기획특집/ 국제결혼 여성들의 삶과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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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자:
2015-11-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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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미군과 결혼한 많은 한국 여성들이 국제결혼이란 이름으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에서의 한인의 역사는 유학생들과 바로 이들 국제결혼 여성들에 의해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문화적, 언어적 차이 등 숱한 고난을 극복하고 미국사회에 정착했다. 국제결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다, 일부는‘양공주’란 이름으로 매도되면서도 한인들의 정착을 돕고 많은 가족들을 초청해 오늘날 미국의 한인사회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재미동포사회의 이민사에서 잊어지면 안 될 국제결혼여성들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조명해본다.
낯설고 물 설은 곳, ‘문화쇼크’에 언어장벽까지...
<국제결혼의 역사>
해방이후 미 군정 시대와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미국’이란 신천지를 발견하게 했다. 1953년 휴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로 세계 109위의 최극빈 국가였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다. 아프리카 국가들보다도 못한 최빈국이었다. 미국의 원조 없이는 국가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시절에 쏟아져 들어오던 ‘미제 물품’들은 풍요한 미국을 동경하게 만들었다.
6.25전쟁을 겪으며 미군과 만나 결혼한 여성들이 미국에 건너오기 시작했다. 주한미군이나 군무원과 인연을 맺어 도미한 경우도 있지만 일부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던 기지촌 여성들도 있었다. 당시 미국에 입양된 한국 고아들과 함께 국제 결혼한 여성들은 50년대 미국에 건너온 선두주자들이었다.
준도슨(84. June Dawson) 씨는 1952년 한국전 당시 피난수도 부산에 와 있던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에서 미군 요원이었던 남편을 만나 결혼해 도미한 케이스.
그는 “유치원 보모로 있다 육군 소속으로 UNKRA에 파견 근무 중인 영감을 만났어요. 당시만 해도 미국 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어. 결혼 안하면 미국 못 간다기에 결혼 하고 바로 미국 왔어요. 내가 한국 여권 번호 927호입니다.”
미 이민국 자료에 따르면 1958년을 기준해 20대 한인의 경우 남자 46명에 여자는 322명으로 무려 7배 가까이 여자가 더 많았다. 1965년에는 남자 404명에 여자 1,761명으로 역시 국제 결혼한 여자들의 도미가 대세임을 알 수 있다.
1965년 미국 이민법의 개정으로 국가별 차별 이민 쿼터제가 사라지고 68년 민권법의 제정은 한국인들에게 이민 붐을 일으키게 했다. 개정법에 따라 미국이 필요로 하는 전문직종과 숙련공들은 물론 시민권자의 자녀와 형제들에게 이민 우선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에 정착해 있던 국제결혼여성들에게는 외로움을 달래줄 가족들을 초청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 가난을 벗어나고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한국인들이 미국으로, 미국으로 몰려왔다.
그 이민 러시의 중추에 바로 미국 시민권자인 국제결혼 여성들이 있었다. 2014년 세계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장을 지낸 은영재 씨(65, 버지니아 거주)도 국제 결혼해 미국에 살던 언니의 형제자매 초청으로 1974년 도미했다고 한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국제결혼의 유형은 대부분 미군과의 혼인이었으며 가족 초청으로 도미했다가 미국인과 만나 결혼한 사례도 다수가 있다. 국제결혼여성들의 권익단체인 워싱턴 여성회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회원들의 사례를 보면 미군과 결혼한 케이스가 70%는 넘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사는 게 고달파도
하소연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외로움에 떨게 했다
어떤 날은 하염없이 울기도
<언어, 문화, 음식의 차이>
가난한 동방의 나라에서 온 한국 여성들의 미국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남편과의 언어와 문화, 특히 음식의 차이는 국제결혼 여성들이 누구나 겪어야 할 벽이었다.
먼저 자신과 익숙한 모국어와 결별하고 오직 영어로만 소통해야 하는 현실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한국어가 통하는 데는 한 곳도 없습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영어로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낯선 땅에서 그것도 말 한마디 제대로 통하지 않는 그 답답함을 누가 알겠습니까?”
70년대에 도미한 순희 모건 씨(메릴랜드)의 회고처럼 언어는 미국생활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국제결혼 여성들을 옭아맨 고통스런 통과의례였다.
특히 아이들이 커 학교에 진학하면서 부닥치는 커뮤니케이션도 고민거리의 하나였다. 학교 행사나 교사 상담 등 자녀교육에 소통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미국식 문화도 생소함을 넘어 문화충격을 안겨주었다. 백인과 흑인으로 양별된 인종사회라는 새롭고 낯선 문화와 만나 혼란 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화장실에 가보니 백인, 흑인 칸이 따로 있어요. 화장실이란 데도 돈 넣어야 문이 열리게 돼 있고 말이야. 한번은 버스를 탔는데 흑인은 뒤 칸이고 백인은 앞 칸에 타게 돼 있어. 어디에 앉아야 할 지 모르겠더라고. 한참 서서 고민하다 그만 다음 칸에서 내렸어. 남편에게 물어보니까 그냥 앞에 앉으라고 해. 그래도 영 어중간해서 택시타고 다녔어요.”
국제결혼 여성들의 맏언니인 준 도슨 씨의 증언이다.
음식도 빼놓을 수 없는 고충이었다. 밥을 주식으로 국과 찌개, 김치, 된장 등을 반찬으로 식생활을 해온 여성들에게 하루 세끼 빵과 육류를 주식으로 한 미국 음식은 적응하기 쉽지 않은 난관이었다.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김혜일 씨(Lily Kim) 씨는 의정부의 세탁소에서 일하다 미군 사병과 만나 1960년 5월 결혼하고 62년 남편과 함께 미국에 왔다. 그는 “말도 잘 안 통하는 미국인 남편과 살면서 서로 문화가 달라 어색한 점도 많이 있었다”며 “양식을 해본 적이 없어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음식은 볶음밥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어떤 이들은 김치 맛이 그리워 마트에서 양배추를 사다가 남미 고추를 갈아서 소금에 절여 김치 대용으로 먹기도 했다.
“양식을 좋아하는 한인여성들도 있지만 음식 때문에 골이 깊어지는 부부들도 많이 봤어요. 김치나 된장찌개 등 한국음식의 냄새를 싫어하는 남편들은 집에 돌아오면 방향제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모든 걸 이해해줄 것 같았지만 그게 오래 가나요?”
1974년 한국에서 미군이던 남편과 만나 결혼한 후 도미한 워싱턴여성회 서옥희(66, Sherry Walters) 회장의 말처럼 음식문화는 부부 갈등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 차이는 부부 갈등으로 이어져 가정폭력이 일어나기도 했고 마약·알코올에 빠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심지어는 학대받다 집에서 쫓겨나 홀로 생활해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편견·외로움 견디며 ‘미주 한인사회’ 기반 다졌다
<편견과 외로움>
국제결혼 커플들이 겪어야 할 문화적 차이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국제결혼 여성들을 바라보는 편견과 혈혈단신 타향살이의 외로움이었다.
단일 유교문화권에서 배타적으로 성장해온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외국인과의 결혼은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국제결혼 초창기에 기지촌 여성들 중에는 흑인 미군들과의 결합도 심심찮게 있었다. 주한미군 남편과 결혼한 여자들을 무조건 ‘양공주’라 지칭하며 멸시하던 시절이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는 것은 물론 가족이나 친지마저도 미군과 국제 결혼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1952년 미국인 잭 에드워드 씨와 결혼해 도미한 에드워드 전 씨(85, 한국명 송전기, 애리조나 거주)는 “과거에만 해도 국제결혼한 여자들에게 ‘양 X’ 등 모멸적 언사가 예사였으며 무조건 색안경으로 쓰고 봤다”면서 “그것 때문에 국제 결혼한 여성들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하고 위축돼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197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후 미 공군 조종사인 남편과 혼인한 신영숙 씨(60, 쉴라 레이호)는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한인사회조차도 한인 간 결혼을 선호하고 국제결혼을 터부시 하는 보수적인 생각들이 강하다”면서 “그러다 보니 국제 결혼한 여성들은 눈에 띄는 것이 부담스러워 외국인 남편과 함께 고국으로 친정 나들이에 나서는 것조차 꺼리게 된다”고 전했다.
특히 사회적 편견은 국제결혼한 부부의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자신의 자녀들을 ‘혼혈아’로 보는 따가운 시선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이러한 편견과 함께 더욱 미국생활을 고달프게 한 것은 고향과 친지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생활고까지 겹치면 견뎌내기 쉽지 않았다.
김혜일 씨는 “삶이 고달파도 누구에게 하소연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나를 외로움에 떨게 했다”며 “어떤 날은 하염없이 운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한미부인회가 창립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모국에 대한 망향심과
그리움이 얼마나 컸겠어요.
몇몇 사람들끼리라도 모이자 했죠
한미부인회는 그렇게 탄생했죠
<조직과 커뮤니티 기여>
1963년 7월7일 한미부인회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서 발기됐다. 에드워드 전 씨를 초대회장으로 6명의 국제 결혼한 여성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었다.
“한국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모국에 대한 망향심과 그리움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래서 몇몇 사람들끼리라도 모여 외로움도 달래고 동포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보자고 한 거지요. 처음에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차츰 우리를 찾는 손길이 많아졌습니다.”
에드워드 전 씨의 회상처럼 한미부인회는 낯설고 물 설은 타국에 사는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이 서로 기대고 권익을 위한다는 취지를 넘어 한인사회와 주류사회 봉사에도 앞장섰다.
“한국 사람이 너무 그리웠어. 한미부인회가 있단 말을 듣고 들어간 거야. 처음엔 한인 식당이나 그로서리가 없으니 집에서 주로 모임을 했어요. 대사관에서도 일이 생기면 먼저 우리한테 연락했어. 한국 여자가 미국인 남편한테 매 맞았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해결 좀 해달라는 전화도 있었고…당시만 해도 대사관에서 미국사회를 잘 모르니까 우리가 해결사 역할을 한 거지. 유학생들도 김치나 한식이 먹고 싶으면 우리에 전화를 할 정도였어. 당시만 해도 국제결혼한 여자들을 보는 이미지가 안 좋아 한인회보다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
준 도슨씨의 말처럼 한미부인회는 한인사회의 친정어머니 역할을 도맡았다. 준 도슨 씨는 68-69년 4대 회장에 이어 86-87년과 95년 등 모두 세 차례 한미부인회(현 한미여성재단)를 이끌었다.
70년대부터 한국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오면서 한미부인회의 역할도 커졌다. 자신들이 초청해온 가족들은 물론 초기 이민자들의 영어 통역, 아파트 마련, 장보기, 살림 장만, 자동차 운전면허 취득, 직장 주선 등 미국생활 정착에 하나부터 열까지 회원들의 손길이 닿았다.
워싱턴 DC에 한인회관을 구입할 때에는 모금파티를 열어 5천 달러란 거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는 한국에서 혼혈아 입양사업을 추진해 12가구 30명을 미국으로 데려와 정착을 도왔다.
주류사회에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헌옷을 수집해 꿰맨 다음 양로원에 갖다 주고, 노인들의 머리와 손톱을 손질해주는 등 사랑을 전했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64년 설립한 펄벅 재단은 한국의 고아 등 헐벗고 차별받는 아동들을 데려와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었다.
<한미여성재단, 워싱턴여성회>
특히 70년대 한국에서 불어온 이민행렬의 뒤에는 국제 결혼한 여성들이 있었다. 시민권을 획득한 이들은 이민 문호가 개방되자 한국의 친정 식구들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부모는 물론 형제, 자매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가족, 친지들의 미국생활 적응을 도왔다.
한미부인회는 그러나 1980년대 초반 회장 선거의 후유증을 겪으며 한미여성재단과 워싱턴여성회로 갈라진다. 국제결혼여성단체가 2개가 되면서 양 단체는 선의의 경쟁을 벌이게 된다.
한미여성재단은 불우한 여성들을 위한 핫 라인 무료전화 개설과 상담, 89년 남편의 학대로 집을 나온 여성들을 위한 보호소(쉘터) 개설, 한국 혼혈아들의 미국 이주 지원 등의 활동을 했다.
1982년 발족한 워싱턴여성회는 출범부터 문화와 장학사업을 목표로 내걸었다. 장면 민주당 정부의 정치고문을 지낸 도널드 휘태커 씨의 부인이었던 고 수영 휘태커 씨가 초대 회장이었다.
여성회는 매년 한국의 혼혈 학생들과 미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회원들의 미 주류사회 진출과 적응, 교육, 친목 도모, 지역사회 봉사 활동 등에 나서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국제결혼 여성들의 세계조직도 출범했다. 2005년 세계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가 발족하면서 매년 한국에서 대회를 열어오고 있다. 회원 간의 네트워크는 물론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해오고 있다.
<국제결혼 가정을 위한 과제>
국제결혼 여성들에 대한 기존의 편견과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유학과 여행 및 취업 등을 통해 교육 수준이 높은 여성들이 자신과 비슷한 지위의 외국인 남성과 결혼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미주 지역에서는 한인 2세와 3세들이 타 인종과 결혼하는 비율이 증가하면서 국제결혼에 대한 거부감과 부정적 인식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더군다나 국제결혼의 역사도 오래 쌓이면서 가정을 꾸린 부부들 간의 지혜와 경험도 축적되고 있다.
국제결혼을 통해 일찍이 두 상이한 문화와 만난 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노력이 결혼생활을 잘 이끄는 비결이라고 입을 모은다.
“나도 젊어서는 미국인인 듯 살았습니다. 나이가 드니 한국인이란 정체성이 돌아옵니다. 갈등 없는 부부는 없습니다. 다만 국제 결혼한 부부는 더 이해하려 하고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국문화를 받아들이는 체인지 마인드를 안 하면 어떤 남자와 살아도 힘듭니다.”
서옥희 워싱턴여성회 회장의 말이다.
준도슨 한미여성재단 고문은 “국제결혼을 하는 미국인 남편들 대부분은 휴머니스트들로 부인을 잘 챙기는 편”이라며 “생소한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만나 사는 게 쉽지 않지만 결국은 배려와 이해가 가정을 원만하게 이끄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은영재 씨는 부부 문제를 넘어 혼혈 자녀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혼혈 자녀들 상당수는 100% 미국인들과 일체화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한 혼혈아들끼리 어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제 결혼한 우리 1세대들은 이제 혼혈 자녀들이 미국사회에서 순조롭게 적응하고 그 정체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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